아무리 바빠도 날 위해 따뜻한 우유 한 접시를 놓아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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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편의점에 간다
가슴이, 아마도 마음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의 한가운데가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의뢰받은 영상물 번역을 위해 캠코더와 싸우다 포기하고 얌전히 짐을 쌌다. 글을 쓰려고 한글 파일을 열었지만 빈 화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깜박이는 커서는 괜한 불안감만 증폭시킬 뿐이었다.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텅 비어 있고 아무것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빌리려 했던 아니 에르노의 책들은 컴퓨터에 분명히 대출 가능이라고 나오는데도 서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땅히 그 책들이 있어야 할 곳엔 다른 책들이 버티고 있었다. 퀵 서비스 아저씨는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물건을 내게 맡긴 채 무연히 떠나버렸다. 나는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무수히 많은 전화를 했고 문자를 보냈다. 조금은 소용이 있었으나 대부분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빌릴 수 없는 책, 소리가 나오지 않는 영상, 잘못 배달된 물건, 써지지 않는 글...... 나는 무력했다. 그래서 슬펐다. 무엇이고 잘 풀리지 않는 날들은 쇠털같이 많았다. 하지만 이토록 슬프고 무력한 날은 많지 않았다. 이 기분이란 녀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심호흡을 하며 곰곰 생각을 더듬었다. 이 아프도록 쓰라린, 날카로운 이빨로 속을 갉아먹는 듯한, 음습하고 싸늘한 공복감은...... 공복감? 혹시...... 나는 배가 고픈 것일까?
설마 하는 마음으로 나는 감자칩을 사서 먹어보기로 결심했다. 열두 시가 넘은 시각이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공허함과 무력감의 실체를 확인하는 일만이 나를 오롯이 지배하고 있었다. 다행히 21세기에는 24시간 감자칩을 살 수 있는 콤비니언스 스토어라는 곳이 존재했다. 맨발에 분홍색 운동화를 꿰어 신고 불이 환한 콤비니언스 스토어를 향해 질주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By the way, 나는 그곳에서 당당히 내 돈 1500원을 주고 감자칩을 구입하였다. 감자칩으로 부족할 때에 대비해 자갈치도 한 봉지 추가했다. 새벽 한 시에 씹어 먹는 감자칩은 평소와 다름없이 맛있었다. 적당한 기름기와 또 적당한 소금기가 세계에서 서른두 번째쯤 외로운 내 영혼을 섬세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자칩이 바닥을 보였다. 자갈치도 바닥을 보였다. 더불어 나의 슬픔도 바닥을 드러냈다. 녀석의 바닥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비로소 내가 보이는 듯했다.
훗. 나란 여자는 정말......-_- 아까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공허함이 엄습했다.

by 당고 | 2009/06/18 01:15 | 사소한 | 트랙백(1) | 덧글(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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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빗맞은 거짓말 at 2009/06/18 14:13

제목 : 훼미리마트
어째서 먹기 싫은 걸까.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밥을 먹지 않고 길을 걷는다. 단지 회사 식당의 밥이라서가 아니다. 집에 가면 제대로 된 집밥을 먹을 수 있다. 라면 하나라도 푸짐하게 차려내는 엄마가 해주는 집밥은 분명 맛있다. 하지만 그걸 원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일단 걷는다. 특별히 가고 싶은 곳도 없다. 딱히 머물고 싶은 곳도 없다. 그냥 걸을 뿐이다. 도로 위엔 퇴근 차량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어서 집에 가서 예쁜 자기가 ......more

Commented by 사은 at 2009/06/18 01:41
몸속이 진공 상태가 될 때. 블랙홀이 뚫릴 때. 저는 막 비스킷을 으깨 얹은 아이스크림을 한 컵. 속이 왠지 뭉클했어요. 당고님 글에.
Commented by 당고 at 2009/06/18 23:33
아이스크림에 오레오를 으깨 얹으면 쿠앤크- ㅋㅋ 사은 님은 역시나 달콤하시군요. 전 짭짤한 감자칩으로 위안을- 원래는 저도 달달한 사람이었는데 흑-
Commented by at 2009/06/18 02:53
이거 엄청 웃기고 슬프다

그냥 재수옴붙은 날이었다고 생각해버려!(나 만난거 빼고ㅋㅋ)

Commented by 당고 at 2009/06/18 23:38
오늘은 제대로 작동하는 캠으로 무사히 바꾸고 친구들도 무사히 만나고 새로 생긴 마트에서 990원에 생리대도 사고 나름 운이 좋은 날이었어 ㅎㅎㅎ 너와 엇갈린 걸 제외하면 말야 ㅎㅎㅎ
Commented by 마르슬랭 at 2009/06/18 03:02
아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과자 두개.. 감자칩과 자갈치...
Commented by 당고 at 2009/06/18 23:38
그쵸! 자갈치는 진리예요, 진짜- 자갈치♡
Commented by 춤추는 나무 at 2009/06/18 05:13
나도 한때 자갈치에 열광했었지. 그나저나 난 감자칩이 1500원이라는 말에 깜짝 놀람. 허거걱. 물가가 이다지도 올랐구나!
Commented by 당고 at 2009/06/18 23:39
감자칩은 보통 1200원인데 저건 해바라기씨 기름에 튀겼다고 1500원 받는 거 있지. 뭔가 새로 나온 게 있길래 집었더니만 ㅋㅋ 물가는 진짜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듯. 그냥 집에서 밥만 먹어야지~
Commented by 치니 at 2009/06/18 09:21
한 편의 산문시 같아요. 좋은데요! ^-^
Commented by 당고 at 2009/06/18 23:40
크크- 좋다기엔 심히 찌질한 내용OTL 뭐 저의 찌질함은 이웃분들의 기쁨이니깐요! ㅎㅎㅎ
Commented by kuna at 2009/06/18 13:14
기분이란 녀석이 어디서 왔다갔다 하는겐지..정말 궁금합니다..'.'a
Commented by 소박하고도 at 2009/06/18 14:47
가끔은 기분이야말로 정말 믿지 못할 무언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놈 참, 어디서 오는겐지
Commented by 당고 at 2009/06/18 23:42
kuna/어떨 땐 먹을 거에서 왔다가 가기도 하는 듯- 몸 상태에 따라서 바뀌기도 하고요. 그저 제가 단순해서 그런 걸지도요 으하-

소박하고도/꾸욱 눌러 참으면 없어지기도 하고, 아무리 눌러 참아도 올라오기도 하는, 그런 게 기분 같아요. 그나저나 반갑습니다 :)
Commented by 루인 at 2009/06/18 14:14
아, 뭐랄까 뭉클하면서도 웃긴 얘기라... 너무 좋아요!

근데 과자봉지 예쁘게 접으셨네요. :)
Commented by 당고 at 2009/06/18 23:43
접어서 버리면 쓰레기 봉투를 별로 차지하지 않으니까요-
찌질한 얘기죠, 뭐. 전 참으로 심오한 인간이 못 되는 것 같아요ㅠ
Commented by 미로 at 2009/06/18 15:31
와, 마지막 사진, 최고최고. 귀엽게 접혀버린 공허감. 귀여워용 하하.
유하의 편의점 참치죽 그 시가 생각나요. 이 시 진짜 좋아하는뎁 ㅎㅎ
Commented by 당고 at 2009/06/18 23:48
미로 님의 말이 더 멋진데요. 귀엽게 접혀버린 공허감이라니 ㅋㅋㅋ 다음에 공허해지면 그놈을 아주 접어버려야겠어요! LG25가 등장하던 시였죠. 참치가 완봉되었다? 뭐 이런 것도 생각나고. 아주 드문드문 생각나는군요-_-;;
Commented by Shoo at 2009/06/18 16:18
정말. 저도 열심히 먹어요. 그럴 때. 가능하면 따뜻하고 배가 부른 것을-
Commented by 당고 at 2009/06/18 23:49
따뜻하고 배부른 걸 먹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저런 과자 따위나 먹었네요ㅠ 밤에는 뭘 구해 먹기도 쉽지 않아서요. 집에서 케이크 같은 거 구워 먹는 사람들이 부러워요. 밤에 퐁당 쇼콜라 같은 게 생각나면 정말 미치겠어요 ㅋ
Commented by 달을향한사다리 at 2009/06/18 20:38
오래 전에 읽어서 주인공 이름도 잘 기억나진 않지만, 신경숙의 "깊은 슬픔"에는 여주인공이 한밤중에 깨어나 찬밥을 물에 말아 꾹꾹 먹는 장면이 있죠. 왠지 그 장면이 떠올라요.... 공허함이 달래졌다면 수단이 뭐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Commented by 당고 at 2009/06/18 23:52
저는 찬밥을 먹는다는 얘길 들으니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하지원이 울면서 꾸역꾸역 밥을 먹던 게 생각나네요- 공허함을 공복감으로 달랜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사는 게 이런 건가 싶기도 했답니다. 그래도 야식은 자제해야 하는데;;
Commented by 은호 at 2009/06/19 01:38
당신이란 여잔 정말 ㅋㅋ 아 나도 감자칩이 먹고 싶군뇨!
Commented by 당고 at 2009/06/19 11:44
당신이란 여자는 어떤데요 ㅋㅋ 나 진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나란 여자, 정말......' 이런다니까요 ㅋㅋㅋ
Commented by sesism at 2009/06/19 16:49
과자봉지에 편지를 써서 접어 보내줘 ㅋㄷ
그런데 난 치토스. 치토스가 좋아. 짱구랑 콘칩도. 흑흑
Commented by 당고 at 2009/06/20 10:51
치토스도 진짜 역사적 과자! 치토스~ 먹고 말 테야~ 요즘은 선전을 안 하는 것 같지? 근데 다 예전 과자들이구나. 짱구도 콘칩도.
과자 봉지에 편지 쓰려면 유성매직으로 써야 할 거 같아 ㅎㅎㅎ
Commented by 달구 at 2009/06/22 09:28
맛있었겠다.

울 동네는 무서워서 편의점이 근처라도 다니기 거시기 한데...킁
Commented by 당고 at 2009/06/23 10:57
크- 밤길이 안 무서운 세상이 되어야 할 텐데. 뭐, 울 동네는 유흥가라 나는 막 돌아다닌다. 홍대는 새벽 4시에도 불야성이야! 젠장-
Commented by 달구 at 2009/06/25 10:04
우린 홍등가임 -_-;;;
Commented by 당고 at 2009/06/25 17:28
홍등가?
거기가 그랬구나. 전혀 몰랐네-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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